1. 시작: 낯선 땅에서의 첫발 (1980년대 중반)
198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한국에서 막 도착한 이민자들은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서도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학력도, 자본도, 언어도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악착같이 살아내겠다’는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
“여기서는 손만 있으면 돼. 미싱 밟을 줄 알면 먹고살 수 있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을 따라 한국 이민자들은 다운타운 봉제공장으로 모여들었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미싱을 밟았다. 발이 부어터지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도 멈출 수 없었다. 고국에 남겨둔 가족, 미국으로 데려와야 할 자녀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꿈이 그들을 지탱했다.

2. 자바시장의 탄생 (1990년대 초반)
몇 년간 품삯을 모은 이들은 하나둘 작은 봉제공장을 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 차고에서, 그 다음엔 작은 창고를 빌려서. 자본이 부족한 이들이 선택한 방식은 ‘자바(Jobber)’ 시스템이었다.
자바시장은 대형 의류 브랜드와 소규모 봉제공장을 연결하는 중간 도매상 역할을 했다. 한국인 자바업자들은 주문을 받아 여러 봉제공장에 분산시키고, 완성된 제품을 모아 납품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김씨의 이야기
“처음엔 미싱 한 대로 시작했어요. 아내랑 둘이서 밤새 옷을 만들었죠. 주문이 많을 땐 친척들까지 불러서 함께 밟았어요. ‘밟아라, 밟아!’ 그게 우리 가족의 구호였어요. 미싱을 많이 밟을수록 돈이 되니까요.”
3년 후, 김씨는 직원 20명을 둔 봉제공장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5년 후엔 자바업자로 변신해 여러 공장을 관리하며 LA 패션 산업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3. 황금기: 코리아 타운의 기적 (1990년대 중후반)
1990년대 중반, LA 다운타운 패션 디스트릭트(Fashion District)는 한국인들의 천지가 되었다. 산티(Santee) 스트리트와 로스앤젤레스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수백 개의 한국인 자바업체와 봉제공장이 들어섰다.
“밟아라 밟아”의 전설
새벽 5시, 공장마다 미싱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이, 김사장! 오늘 물량 언제 나와?” “밟아라 밟아! 이번 주까지 5천 장 납품해야 해!”
‘밟아라 밟아’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언어였고, 성공의 주문이었으며, 한국 이민자 공동체의 연대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이 시기 LA 자바시장의 특징:
- 24시간 가동 시스템: 주간조와 야간조로 나뉘어 쉬지 않고 생산
- 가족 경영: 온 가족이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 상부상조의 문화: 큰 주문이 들어오면 여러 공장이 협력해 소화
- 빠른 생산력: “3일이면 만들어준다”는 명성으로 바이어들 사이에서 입소문
4. 시련과 변화 (2000년대)
하지만 영원한 황금기는 없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첫 번째 위기: 중국 제조업의 부상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대량생산 시스템은 LA 자바시장을 위협했다. 가격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많은 브랜드들이 해외 생산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는 가격만으론 안 돼. 빠른 납품과 소량 다품종이 우리의 살길이야.”
한국인 자바업자들은 전략을 바꿨다. ‘퀵 리스폰스(Quick Response)’ 시스템을 구축해 1-2주 내 소량 주문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두 번째 도전: 세대교체
1세대 이민자들이 은퇴 나이에 접어들면서 세대교체가 시작됐다.
“아들아, 이 공장 네가 물려받아라.” “아빠, 전 다른 길을 가고 싶어요.”
많은 2세들은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의 길을 택했다. 부모 세대가 그토록 열심히 밟은 미싱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그 사업을 이어받으려는 이는 많지 않았다.
5. 재탄생: 새로운 패러다임 (2010년대 이후)
놀랍게도 LA 자바시장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패스트 패션의 동반자
자라(Zara), H&M 같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빠른 생산’을 원하면서 LA 자바시장이 재조명받았다. 한국인 업체들의 신속한 대응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스타트업 브랜드의 산실
젊은 디자이너들과 패션 스타트업들이 소량 생산을 위해 LA 자바시장을 찾았다. 중국은 대량 주문만 받지만, LA는 100장도 만들어줬다.
2세들의 귀환
흥미롭게도 일부 2세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박 씨의 아들, 데이빗 박의 이야기:
“아버지는 평생 미싱을 밟으셨죠. 저는 그 경험을 기술과 결합하고 싶었어요.”
데이빗은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어 디자이너와 봉제공장을 직접 연결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전통적인 자바 방식에 IT 기술을 접목시킨 것이다.
6. 현재의 모습 (2020년대)
2025년 현재, LA 다운타운 패션 디스트릭트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하지만 그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물리적 변화
- 옛 봉제공장 건물들은 로프트와 스튜디오로 탈바꿈
- 일부는 패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로 변신
- 샘플 제작과 소량 생산에 특화된 ‘스마트 팩토리’들이 등장
산업 구조의 진화
- 전통적인 미싱 공장 수는 줄었지만
- 기술, 디자인, 물류를 통합한 고부가가치 서비스로 전환
- 지속가능한 패션, 로컬 생산에 대한 관심으로 새로운 기회 창출
1세대의 이야기
80세의 김 할머니는 여전히 가끔 공장에 들른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버튼 하나 달 줄을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 때는 손으로 밟았지만, 이젠 머리로 밟는 시대니까요. ‘밟아라 밟아’의 정신은 똑같아요. 열심히 하면 된다는 거.”
에필로그: 밟아라 밟아, 그 정신은 계속된다
‘밟아라 밟아’는 단순히 미싱 페달을 밟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포기하지 마라’, ‘더 열심히 하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1980년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한국 이민자들은 그 정신으로 LA를 미국 서부 최대의 패션 생산 거점으로 만들었다. 봉제 산업이라는 작은 틈새에서 시작해, 결국 미국 패션 산업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지금 다운타운을 걷다보면, 여전히 미싱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예전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 소리는 계속된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는 여전히 울려퍼진다.
“밟아라 밟아.”
후기: LA 자바시장은 한국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언어도 자본도 없었지만, 근면함과 연대, 그리고 ‘밟아라 밟아’라는 불굴의 정신으로 새로운 역사를 썼다. 그들이 밟은 미싱 페달 하나하나가 모여 오늘날 LA 한인 커뮤니티의 기반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예술가로 성장했다. 미싱을 밟던 그 손이 이제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수술칼을 잡고, 법전을 펼친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밟아라 밟아’의 정신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